
막이 오르면 관객들은 ‘밝고 즐거운 춤과 노래’ 같은 뮤지컬에 관한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대신 무채색의 세트와 음침한 조명, 귀가 찢어질 듯한 금속성의 기계음과 피가 낭자한 복수극에 익숙해질 준비를 해야 한다.
배경은 19세기 산업형멱기의 영국 런던. 도시는 회색빛 먼지를 덮어 쓰고 있고, 자본주의의 톱니바퀴에 낀 민중은 일개 기계부품과 다름 없이 살아간다. 젊은 이발사 벤자민 바커는 산업화, 물질만능주의에 치여 인간성마저 상실한 노동자를 대변한다. 바커는 무소불위의 귀족 판사에게 아름다운 아내와 딸을 빼앗긴 뒤 추방 당한다. 복수의 칼을 갈며 이리저리 떠돌다 십여년 만에 런던으로 돌아온 돌아온 그는, ‘스위니토드’라는 이발사로 신분을 위장하고 잔인한 살인마가 된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의 복수심은 점차 무고한 사람들까지 죄책감 없이 죽이게 되고, 아래층 파이집 여주인은 그의 복수극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인육(人肉)를 제공 받아 파이를 구우며 살인을 부채질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훌륭한 음악이다. 엔드루 로이드 웨버와 비견되는 뮤지컬 음악의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1930~)은 무조적인 선율과 불협화음 등 현대적인 작곡기법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불안한 정서와 자꾸만 비틀리는 스위니토드의 운명은 음악과 완벽히 밀착된다.
또,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이용한 작곡기법은 오페라를 연상시키도 한다. 실제로 고난도의 성악 발성이 요구되는 탓에 출연 배우의 대다수가 오페라 가수로 활동한 적이 있거나 성악을 전공한 인물로 캐스팅됐다. 브로드웨이 공연에서도 주인공 역할은 기존 성악가가 맡는 것이 관례화돼 있으며, 이 작품은 정통 클래식을 추구하는 오페라단이 공연하는 거의 유일한 뮤지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잔혹하다고 해서, 불편함이나 거부감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산업화 사회의 비극을 짊어진 한 인간의 복수와 파멸’이라는 주제는 무겁지만, 이 주제를 끌고 가는 주인공 스위니토드는 묘한 페이소스를 자아내며 관객들을 흡입한다. 또, 비극적인 이야기의 사이사이에 희극적인 요소가 숨어 있어 객석에서 연방 웃음이 터져 나온다.
캐스팅도 성공적인 편이다. 류정한은 노래 뿐 아니라 광기어린 연기에 있어서도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눈 앞에서 코핀 판사를 놓치고 난 뒤 분노를 이기지 못해 칼을 휘두르며 절규하는 장면에서는, 관객들의 몸에도 전율이 일 정도다. 러빗부인 역을 맡은 홍지민 역시 탐욕스럽지만 유머러스한 캐릭터를 재치있게 소화해낸다. 이밖에 토비어스 역을 연기한 홍광호에게도 기대를 뛰어넘는 호연이라는 평이 쏟아지고 있다.
국내에는 ‘그리스’ ‘캣츠’와 같은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지만, ‘아는 사람’은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수작이다. 주저 없이 선택해도 후회가 없을 듯하다. 10월 14일까지.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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