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7일 수요일

중세 골목에서 찾아낸 ‘프라하의 속살’

프라하란 말에서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떠올린다면 구세대, SBS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을 떠올린다면 신세대쯤 될까. ‘프라하의 봄’이라 해도 밀란 쿤데라의 소설과 영화가 먼저 연상된다면 ‘낀세대’일지 모른다. 그 모든 것이 프라하에 있고, 혹은 없다. 프라하를 새롭게 만나기 위해선 이제껏 굳은 이미지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걸어야 한다. 동서 약 25㎞, 남북 15㎞의 시는 밀도 있게 정리돼 있어 주요 관광지만 돌아보는 데 하루 이틀이면 충분하다. 10세기 말 건설되기 시작한 도시는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듯 고고하고 섬세하다.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시가지는 돌로 쌓은 역사가 좁은 공간에 다양하게 교차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폭격을 피한 덕에 여러 민족과 문화, 종교가 수백 년 동안 공존·대립했던 중세 도시의 향취를 온전히 만끽할 수 있다.

프라하의 첫 대면은 대체로 바츨라프 광장에서 시작한다. 돔형 지붕을 지닌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국립박물관부터 지하철 무스텍역까지 이어진 너비 60m, 길이 700m의 대로다. 흔히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공산개혁을 이끈 68년 민주화운동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89년 벨벳혁명 때도 수십만 명의 시민이 이 광장을 메웠다.

광장, 혁명에서 만남으로

그러나 지금 광장은 혁명이 아닌 만남의 장소다. 광장 주변에는 호텔·레스토랑·은행·환전소들이 늘어서 도시의 활력을 주도한다. 대로 양쪽 각양각색의 건축물을 따라 고색창연한 멋을 즐기려는 관광객들이 종종걸음 친다.

체코 전체 인구는 10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연 1억 명을 헤아린다. 가게 종업원을 제외하고 만나는 이들 전부가 관광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지인처럼 느긋하게 즐기는 커피’ 같은 감상은 집어치우자. 이곳은 모두가 여행자다. 서로가 서로를 관광 대상으로 응시한다. 붙박아 살러온 사람이 아니라 이내 떠날 사람들의 가벼운 발걸음이 도시를 활기차게 만든다.

예컨대 우연히 들어간 크리스털 공예품점. 체코산 크리스털의 영롱함만큼 기분 좋은 것은 상점 종업원의 환대다. 터키 출신 남자는 기분 좋게 “안녕하세요?” “안 비싸”라는 한국말을 연발한다.(2004년 프라하 직항이 개통되면서 한국인 여행객이 부쩍 늘어서일 게다). 하지만 볼품없는 관광객이 지갑 사정에 체념해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하면 그는 표정을 바꾸고 “원 포토, 텐 달러스(One photo, ten dollars)”를 외친다. 한 장의 그림엽서처럼 정제된 이 도시 속에서 생물처럼 꿈틀대는 욕망을 대면하는 순간이다.

카프카의 미로, 유대인 지구의 명품거리

광장이라는 허파를 빠져나가 모세혈관 같은 골목으로 접어든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은 프라하의 1000년 역사를 증언한다. 2002년 이곳은 몰다우(블타바)강의 범람으로 심각한 침수 피해를 봤지만 가을 햇살 아래 그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구시가 광장에서 카를교로 이어지는 중세 골목의 연쇄회로는 도시의 산책자가 거닐기에 최적의 코스다. 골목에 보이는 집 안쪽을 들여다보면 구석구석 작은 상점들이 늘어서 쇼핑객을 유혹한다.

도시를 동서로 나누는 몰다우강에 놓인 다리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이 카를교다. 동상 30기를 배경으로 거리의 악사들이 아우성치듯 연주한다. 붐비는 풍경을 뒤로하고 네루도바 언덕길을 오르면 도시의 아이콘인 프라하성을 만날 수 있다. 실존주의 작가 카프카가 쓴 소설『성』의 모델이 된 곳이다. 1883년 프라하 유대인 지구에서 태어난 카프카는 41년의 짧은 생 동안 몇 번의 여행과 체류를 제외하곤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내 인생은 이 작은 원 속에 갇혀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비록 소설 어느 한 곳에도 프라하라는 이름이 명시된 적은 없지만 프라하성에서 이어지는 황금골목을 거닐다 보면 카프카의 정신세계 속 미로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살던 곳을 떠나지 않고 20세기의 걸작들을 남긴 사람이 있는가하면 “사막을 건너고, 빙산 위를 떠다니고, 밀림을 가로질렀으면서도, 그들의 영혼 속에서 그들이 본 것의 증거를 찾으려 할 때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유대인 지구 파르지주스카 거리도 또 다른 아이러니의 현장이다. 기나긴 역사 동안 박해받은 유대인들은 묻힐 곳조차 자유롭게 허락받지 못했다. 15세기에 설립된 유대인 묘지엔 1만2000개의 묘석 아래 10만여 구의 시신이 묻혀 있다. 매장 공간이 부족해 흙을 운반해 와 겹쳐 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묘지를 방문하기 위해선 다른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와 묶어 보는 공통 티켓을 사야 한다. 탄압의 역사를 관광 코스로 개발한 후대인의 명민함에 맞물리기라도 하듯 널찍한 대로 양쪽엔 에르메스 등 명품숍이 즐비하다.

인형극·마임·클래식… 공연 천국

매년 5월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음악제가 열리는 프라하는 연중 공연을 만날 수 있는 도시다. 모차르트가 오페라 ‘돈 조반니’를 초연한 에스타테스극장을 비롯해 국립극장·국립오페라하우스 등 3대 공연장은 모두 18·19세기의 양식을 재현한 아름다운 건물들이다. 봄 음악제가 시작되는 곳은 시민회관의 스메타나홀. 3주 동안 스메타나홀과 루돌피눔, 오페라하우스, 비투스 성당 등에서 주당 20회가 연주될 정도로 흔하게 음악회를 만날 수 있다. 일반 교회에서도 수준 이상의 연주회와 합창을 감상할 수 있다.

체코에선 또 인형극 공연이 활발하다. 독일어를 강요받은 시대 체코어가 유일하게 허용된 장르라는 역사성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가족 단위 관광객이 함께 즐기기에 알맞아서다. 국립인형극극장(National Marionette Theatre)에선 91년 인형극 ‘돈 조반니’가 무대에 올려진 뒤 3500회 이상 공연되고 6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오페라뿐 아니라 비틀스의 노래 ‘노란 잠수함’을 각색한 공연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프라하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또 다른 오리지널 공연으론 블랙라이트 시어터(black light theatre)가 있다. 어두운 무대를 배경으로 형광도료를 사용한 의상이나 소품을 이용해 극을 연출하는데, 마임극 위주라 이해가 쉽고 빠른 템포의 경쾌한 구성으로 어른부터 아이까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체코에서 즐기는 가을 맥주

지난 7일 막을 내린 독일 바이에른주의 ‘옥토버페스트’는 유럽 최대 맥주 축제다. 이 때문에 곧잘 ‘맥주=독일’로 통하지만 1인당 연간 맥주 소비량이 유럽 제일인 곳은 체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브랜드 ‘버드와이저’도 원래 체코의 남보헤미아 부데요비체에서 생산되는 부트바이저(Butweiser)에서 유래했다. 체코는 지방마다 전통 맥주 양조장이 즐비한데 이를 엮어서 둘러보는 ‘비어 투어’가 요즘 인기다. 대표적인 게 필젠 지방에서 생산되는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 숙성 맥주인 라거를 대표하며 체코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브랜드다.

은은한 호박색을 띠며 맛이 깨끗하고 향이 진한 편이다. 필젠의 양조 역사는 바츨라프 2세가 다스리던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근대적인 생산은 1842년 시민양조장의 설립과 함께 시작된다. 현재 필스너 우르켈 맥주 공장은 양조장이 설립됐던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100년 가까이 증축돼온 지하 숙성창고는 총길이가 9㎞에 가까운데, 숙성 나무통에서 갓 따른 맥주의 맛이 산뜻하기 이를 데 없다. 맥주 생산 과정과 역사를 시대별로 재현한 ‘맥주박물관’도 인근에 위치해 있어 들러볼 만하다.

전통 양조장으로 유명한 ‘자텍(Zatec)’도 빼놓을 수 없다. 프라하에서 북서쪽으로 75㎞ 떨어진 이 작은 도시는 800년 전부터 최고 품질의 호프(hop)를 생산해 현재까지 풍부한 맛의 ‘자텍’ 맥주를 자랑하고 있다. 7곳의 양조장과 11곳의 몰트하우스로 대표되는 1000년여 역사의 흔적이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의 다양한 양식(르네상스·고딕·바로크 등)에서 느껴진다. 시청 탑에서 내려다보면 전신주처럼 우뚝 솟은 오래된 양조장 굴뚝들을 볼 수 있는데, 시는 이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것을 추진 중이다.

이 밖에 왕관 모양 아이콘으로 유명한 ‘크루소비체(Krusovice)’ 등도 공장 견학의 문을 열어놓고 있어 각 사의 맥주를 비교하며 시음하는 맛이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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